[플래닛03] 『기후 돌봄』 저자 4인 인터뷰

권범철/ ‘돌봄’은 현존하는 질서와의 싸움이다

올바른 행동을 한다는 것은 곧 성공이다

책을 만드는 일,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과 나누는 시간, 번역과 같은 일을 좋아하지만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건 생태 문제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관심이 있었던 ‘예술과 커먼즈’라는 주제를 ‘생태 문제’와 함께 고민하고 활동하는 데 관심이 있다. 생태적지혜연구소 협동조합에 있는 분들과 여러 활동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다. 기후 문제를 생각하면 우울에 빠지기 쉬운데 연구소분들과 이야기하고, 생각을 나누고, 할 일을 준비하면서 힘을 얻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스스로도 많이 질문한다. 그럴 때마다 반다나 시바의 말을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결코 올바른 행동에서 실패한 적이 단 한번도 없으니까요. 올바른 행동을 한다는 것이 곧 성공입니다. 실패는, 할 수 있고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을 때, 그때 있는 거예요.”

‘돌봄’은 현존하는 질서와의 싸움이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돌봄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 이제 ‘돌봄’의 범주를 인간으로 한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돌봄의 대상은 비인간 자연뿐 아니라 사물까지 확장된다. 돌봄의 범주 확장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돌봄이 지니는 의미다. 한국어에서 돌봄은 ‘보살피다, 도와주다’ 등 양육이나 간호의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제한적 성격을 갖는다. 그 의미를 확장해야 한다. 돌봄을 생활의 중심에 두고 어떤 의미인가를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현실 사회는 돌봄이 아니라 일을 강제하고 있다. 노동을 중심으로 짜여진 사회는 ‘서로 돌보기’보다 ‘경쟁을 통한 밀어내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돌봄’은 주변화되었다. 돌봄은 현존하는 질서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돌봄은 타인을 받들고 섬기는 봉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선순위에 ‘돌봄’을 두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본분과 싸우는 일이다. ‘돌봄’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은 현재의 질서와 싸우는 일이면서 동시에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삶의 결핍은 성장 시스템이 가진 모순적 속성에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경제 발전과 생태계의 보전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입장으로, 경제 발전이 인간의 안녕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경제 발전이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생태적으로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억압에 불과하다.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인간을 노동하도록 강제하고 삶의 모든 시간을 노동에 매몰시키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공장, 사무실, 혹은 집 안에 갇혀 노동하는 삶이다. 과연 어디까지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현재의 ‘경제 발전’이란 인간에 대한 억압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탈성장을 강조하는 이유다. 탈성장이란 삶의 위축, 결핍이 아니라 삶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삶의 위축과 결핍은 성장 시스템이 가진 모순적 속성에 있다. 삶을 생존으로 바꾸고 노동에 매몰시킨다. 탈성장이란 현재의 억압적인 성장 시스템에서 벗어나 좀 더 다양한 삶의 경로를 만들어가는 일과 관련 있다.

소비는 긴 노동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소비란 가장 짧은 시간에 기쁨을 주는 행위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 왜 인간은 소비라는 행위에 몰입하게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노동시간의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노동을 끝없이 강제하는 시스템이다. 나 자신에게 혹은 주변 사람들, 식물, 동물, 자연에 몰입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학교, 사무실, 공장 등 자본주의 안에서 모든 제도는 공장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 공장으로 가고 해가 져야 집에 들어오는 삶을 살면서 다른 무엇에 몰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한국은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음주처럼 빠르게 쾌감을 얻는 생활양식들이 특징적으로 관찰된다. 상대적으로 긴 노동시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비는 가장 손쉬운 쾌락의 도구가 된다. 이러한 소비는 우리를 절대 만족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욕망은 기본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상품은 정의된 사물이며 구체적인 형태와 기능을 갖고 있다. 우리가 그 사물을 욕망한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그 사물은 우리의 욕망에 절대 들어맞을 수 없다.

직접적인 노동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삶을 지원하는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팽창하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생활양식은 노동시간의 단축이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할 것이다. 노동시간이 단축되어야 대안적 생활양식을 찾아갈 수 있다. 성장을 해야 일자리가 늘고, 나도 일자리를 구해 임금을 받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상황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런 생각은 나를 지원할 수 있는 공적인 혹은 공동체적인 보조가 부족한 사회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한국이 그런 사회다. 재생산을 위해 기댈 수 있는 다른 무엇인가로 ‘돌봄 관계’에 집중했다. 보조할 수 있는 제도적인 수준에서의 지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삶에서 기초적이고 중요하지만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주거, 의료, 교육 등의 사안들에 대한 사회적인 지원은 꼭 필요하다. 이러한 영역들이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로 남을 때 우리는 더욱 일자리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탈성장의 길도 요원해질 것이다. 직접적인 노동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지원하는 제도들을 더욱 확장해야 한다. 그런 제도가 뒷받침될 때 다양한 삶의 경로를 개척하는 활동도 늘어날 수 있다.

도시를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들도 함께 살 수 있는 곳으로 바꾸어야 한다

페데리치의 말을 빌려 ‘도시의 시골화’라는 표현을 쓴 것은 다른 지역, 특히 시골에 기생하고 있는 도시의 상태를 바꾸어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도시민의 일상은 다른 어딘가의 파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범죄에 연루되게 된다. 도시를 ‘살림살이’의 관점에서 자급할 수 있는 곳으로 바꾸어야 한다. 도시를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들도 함께 살 수 있는 곳으로 바꾸어야 한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를 시골화하기 위해서는 서울과 수도권에 지나치게 집중된 인구를 분산하는 일이 필요하다. 지나친 인구 집중은 도시를 끝없는 개발과 ‘공사 중’의 상태로 몰아가고 ‘시골화’의 여지는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도시에서 ‘자연’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현재 도시에서 자연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은 공원뿐이다. 도시 공원의 경우 철저하게 심미화된 소비 공간으로만 유지된다. 그곳에서 할 수 있는 활동에도 강한 통제가 이루어진다. 그런 공원조차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지만 도시의 자연에 대한 상상력이 ‘공원’에 머무르는 것은 문제다. 인간이 보기 좋은 상태로 꾸며진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생물 종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텃밭과 같은 공동체적 자급과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돌봄’에 한 걸음 다가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권범철 | 생태적지혜연구소 | ‘돌봄’은 현존하는 질서와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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