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금실 ‘포럼 지구와사람’ 대표가 대담을 위해 지난 8일(현지시간)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존 캅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명예교수를 만난 곳은 클레어몬트의 필그림 플레이스다. 필그림 플레이스는 캅 교수가 살고 있는 독특한 은퇴 시설이다. 여느 은퇴 시설들과는 다르다.
노인들이 독립 공간에서 생활하면서도 공동체를 이뤄간다. 100여 명의 구성원들은 식사 때면 테이블 번호표를 추첨한다. 서로 두루 만나기 위해 만든 규칙이다. 식재료는 유기농 농산물이며, 마시다 남은 물은 한데 모아 나무에 준다. 구성원들은 마을회의를 열어 자신과 관련된 사항을 직접 결정한다.
필그림 플레이스는 캅 교수가 강조해오고 있는 공동체의 단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캅 교수는 “여기 구성원들은 복지에 관한 관심을 공유한다. 서로를 책임지려고 한다. 돈 때문에 떠나는 이가 없도록 노력한다”며 “그래서 여기는 공동체”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국제콘퍼런스’에 참여한 캅 교수와 강 대표를 묶는 키워드는 ‘공동체’ ‘생태’ ‘지구’다. 필그림 플레이스는 당대 최고 신학자의 주거지이자 공동체의 작은 표본이라는 점에서 최적의 대담 장소다.
■ 인간 아닌 사물과 존재에게도 권리를
캅 교수는 여느 신학자들과 달리 1970년대 초부터 지구 생존 문제를 고민했다. 그가 강조하는 자연과 공동체를 중심에 두는 생태문명의 가치도 이때 나왔다.
“인류는 단일경작 등을 통해 토양을 황폐화하고 식물의 유전자를 변형시키기도 합니다. 이젠 땅에 대한 착취를 멈춰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임무는 토양을 회복시키는 자연적인 방식을 찾는 겁니다. 그동안의 문명은 생태를 파괴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강조하는 생태문명이 ‘반(反)문명’은 절대 아닙니다.”
그는 콘퍼런스와 대담에서 생태문명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다만 물리학자와 엔지니어는 인간에 대한 특별한 주의, 생물권역의 번성을 고려하면서 연구와 프로젝트를 해야 한다”고 했다.
강 대표는 인간 외의 다른 존재에는 가치를 두지 않는 과도한 인간중심 가치관이 오랜 생명 진화의 역사를 거스르며 지구마저 파괴하는 생태위기 상황을 초래했다고 본다. “자연을 물건 취급하며 내다 버려도 지구가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생태 문제가 생겨난 겁니다. 인간만을 주체로 설정하고 다른 모든 사물과 존재를 객체(물건)화하면서 발생한 문제이죠. 근대법이 대표적입니다.”
강 대표는 2008년 4월 총선 이후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직을 사퇴한 뒤 현실정치 너머를 고민해왔다. 2009년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을 다닌 것도 그런 이유다. 미국 생태사상가 토머스 베리를 연구하며 ‘지구중심적 권리’를 공부한 그는 2015년 ‘포럼 지구와사람’을 창립했다. 이번 콘퍼런스에선 ‘지구법, 법과 거버넌스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란 주제발표를 했다.
“지구법은 자연을 권리주체로 보고 그 권리를 보호하자는 것입니다. 파괴를 막기 위한 보호장치를 만들고, 존재 간 상호존중의 시대를 열자는 취지를 담은 법이죠.” 그는 ‘자연의 권리’를 전면으로 인정한 2008년 개정 에콰도르 헌법, 인간의 권리를 부여한 2017년 뉴질랜드 ‘황거누이강’ 법안을 예로 들었다.
캅 교수는 자신이 주창한 생태문명 담론이 한국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지 궁금해했다.
강 대표가 답했다. “생태문명 개념을 아직 잘 알진 못합니다. 다만 한국 사회는 변하고 있죠. 나라 전체가 지속가능발전 목표를 거버넌스 원리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기후변화나 에너지 전환에 큰 공감대가 생긴 겁니다. 나라 안팎에서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분위기가 무르익어갑니다. 생태문명의 시대가 와야 지구법 시대도 열릴 수 있다고 봅니다. 인간을 제외한 존재도 존중하는 데까지 나아가면 근본적인 시스템 전환을 이룰 수 있을것으로 봅니다.”
강 대표는 한국의 중앙·지방 정부의 비전과 실행 등을 강조하기도 했다. “정부는 대선과 집권으로 공동체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죠. 문재인 정부가 잘하는데, 생태평화를 두고도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면 좋겠습니다. 서울시도 물질 중시 성장사회에서 경시되었던 사람 가치를 회복하는 일을 한다고 봅니다. 지구와 사람의 가치를 분명하게 목표로 세우면 더 힘차게 진행할 수 있을 겁니다.”
■ 고통을 주는 것은 사악하다
캅 교수는 육식에 대해 “고통을 주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악하다”고 말했다. 오늘날 육식을 위한 먹거리가 잔인한 방식으로 사육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는 동물들이 겪는 고통은 죽음의 순간만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있습니다. 고기 소비는 동물의 고통에 무관심한 산업을 지탱하는 일인 셈이죠.”
한국에선 최근 ‘살충제 계란’ 파동을 겪었다. 수입 쇠고기 광우병 파동, 구제역에 따른 가축 살처분 등도 이뤄졌다. 2016년 살처분 숫자만 3300만 마리를 넘겼다.
강 대표는 공장형 축산시스템의 개선을 강조했다. “육식을 둘러싼 여러 파동들은 공장형 축산시스템이 그 원인이라는 것을 이제 대부분 알죠. 그런데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가치관이죠.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동물은 그들 하나하나가 경험의 ‘주체’라는 겁니다. ‘동물권’은 이제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추세입니다. 생명과 자연의 권리도 이 방향으로 가리라 봅니다.”
■ 자기파멸로 이끄는 교육
캅 교수의 방에는 중국 베이징의 ‘화이트헤드 유치원’에서 원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책장 한쪽에 놓여 있다. 화이트헤드 유치원은 그가 평생 연구한 화이트헤드 철학의 상호연결성 개념을 적용한 유치원이다. 그는 “대부분의 유치원은 시험 준비를 교육하지만 이 유치원은 인생을 즐기는 걸 가르친다”고 설명했다.
캅 교수는 이번 콘퍼런스에서 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생태문명에 기반을 둔 교육이란 무엇일까. 대담 주제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현재 교육은 선보다 해악이 큽니다. 상대가 잘살면 나는 못살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죠. 서로 경쟁하고 반대하게끔 가르치는 게 지금의 교육입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지구의 수용력을 파괴하면서 우리를 자기파멸로 이끄는 겁니다. 아이들의 건강한 발달이 아니라 경제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주제와 기술만을 가르치죠. 고등교육도 마찬가지고….”
강 대표도 동의했다.
“지금 학생 자녀를 둔 한국의 가정들은 웬만해선 가족 모임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학교나 학원에 가 있기 때문이죠. 지금 교육제도는 윗세대가 자라던 당시 경제성장 가치관을 교육시킵니다. 경제성장과 교육열은 굉장한 에너지를 일으키면서 물질적 발전을 이끌었지만, 지금은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은 급격한 근대화로 물질 중심의 가치관이 팽배해 ‘사람이 먼저다’라는 대선 공약이 나올 정도입니다. ‘지구가 먼저다’라는 캐치프레이즈가 필요합니다. 이젠 모든 존재를 객체 취급한 걸 반성해야 하죠.”
이번 콘퍼런스와 관련, 캅 교수는 “콘퍼런스 아이디어를 주최측인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과정사상연구소 한국생태문명프로젝트’의 한국인 학자들과 논의했다”며 “내년에는 한국에서 생태문명 콘퍼런스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강 대표는 “콘퍼런스에 참가한 중국 학자들이 지구법 발표에 적극적 반응을 보였다”며 “한국인 전문가들뿐 아니라 한·중·미·일 전문가들 간 네트워크 형성 가능성을 본 게 가장 큰 성과”라고 말했다. 그는 “생태문명이란 담론을 비전으로 삼아 우리가 이미 하는 것들,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는 것을 묶어낼 수 있다고 본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종목 기자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1711132158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