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신학자·환경사상가 존 캅
“끔찍한 재앙 피할 가능성 없어
화려한 수사보다 필요한 행동을”
글로벌경제서 로컬경제로 전환해야
지난 여름을 기억하는가. 밤에도 섭씨 30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며 편히 잠을 이루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그 끔찍한 더위. 연일 사상 최고 기온을 갱신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기후변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더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꼈을 테다. 하지만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자 그런 결심도 식어버렸고,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괜찮은 걸까?
‘너무 늦은 걸까?’ 1971년 미국 신학계엔 이런 제목의 책 한 권이 출간됐다. ‘생태신학’이라는 생소한 주제를 다루는 첫 번째 책으로 꼽힐 이 책의 지은이는 ‘과정신학’이라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단적으로 보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학을 주창해 주목을 받는 소장 신학자였다. 그는 40대 중반에 중대한 ‘회심’을 경험했다. 그의 회심은 일반적인 종교적 체험과는 달랐다. 그의 존재를 뒤흔든 깨달음은 영속하리라 생각한 인간의 문명이 사실은 멸망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는 현대 자본주의 산업문명을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고 열정적으로 활동해왔다. 세계 각국의 경제학자, 건축학자 등 다른 분야의 학자들만이 아니라, 불교, 힌두교 등 타 종교인까지 가리지 않고 교류하며 생태문명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왔다. 올해로 93살이 된 그는 이제 원로 생태사상가로 꼽히지만, 여전히 세계를 다니는 활동가로 살고 있다. 그는 존 캅 주니어(John B. Cobb Jr.)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명예교수다.
그가 서울시가 주최하는 ‘전환도시 국제콘퍼런스’(11~12일)와 지구와사람 포럼의 ‘생태문명 국제콘퍼런스’(12~14일)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의 방한에 맞춰 그의 글들을 모은 <지구를 구하는 열 가지 생각>이란 제목의 책도 출간됐다. 한국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던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과정사상연구소의 한윤정 연구원이 캅의 삶과 사상 전반을 조감할 수 있는 미출간 글들을 엮어서 번역해 낸 책이다. 지난 10일 서울 중구 더 플라자호텔에서 캅 교수를 만났다. 정건화 한신대 교수(경제학과)가 통역을 맡았다.
“제 생각에 끔찍한 재앙을 피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기로 운명지어졌습니다. 이미 광범위한 문명의 쇠퇴를 막을 수 있는 시점은 지났고, 남은 것은 더 나빠지지 않도록 하면서 재건을 위한 기반을 얼마나 남기냐는 싸움뿐입니다.” 그가 말하는 문명 붕괴는 어떤 상황을 뜻하는 걸까? “정말 많은 시나리오가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실제로 일어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거대한 전쟁이나 핵전쟁도 여전히 큰 가능성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기후변화로 30년 안에 토양과 물이 고갈돼 인류에게 충분한 식량을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공산주의와 경쟁에서 그랬듯이 예의 자기 수정 능력을 발휘해 생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일까. “불행히도 자본주의 체제의 주요한 생산 동기는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윤이죠. 이 체제로는 작금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글로벌 경제에서 로컬 경제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번에 나온 책에 실린 글에서 지역 단위 경제로의 급진적 전환을 제안했다. 대규모의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전 세계적 생산과 무역 체제를 끝내고 지역 안에서 생산하고 소비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역에서 재배되는 식재료로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지역 단위로 생산한 대체에너지로 에너지 사용을 충당하고, 지역은행들이 발행한 지역화폐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불편한 삶을 선택하려 할까?
“물론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 사람들 대부분은 일자리나 집을 구하고 가족을 돌보는 데만 관심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에 사람들이 전혀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뭔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없을 때, 단기적인 시야에 갇히고, 대안에 무관심해집니다.” 그렇기에 그는 사회를 이끌고 가는 지도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한 데에는 생태회칙 <찬미 받으소서>(2015)를 발표한 프란치스코 교황과 중국에서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최근 들어 중국 공산당 정부의 초청으로 매년 중국을 방문해 생태도시 건설에 대해 조언을 해준다고 한다. 방한하기 직전에도 중국 저장성 리수이시에서 2주간 있다가 오는 길이었다.
그는 2012년 중국 공산당이 당헌에 생태문명을 국가 목표로 포함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중국 정부의 리더십은 생태문명으로 변화하는 노력에 협조적입니다. 중국 정부는 사람들에게 귀농의 삶도 매력적임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실제로 적은 규모지만 귀농을 선택하는 젊은 사람들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끔찍한 결말이 다가왔을 때 농촌은 문명의 생존을 위한 교두보가 될 것입니다. 리더십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주고 이끌어갈 때, 사람들은 무관심의 상태를 깨고 나올 수 있습니다.”
그는 중국보단 미국에 더 비관적이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반환경주의자이자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그는 트럼프 대통령으로 인해 오히려 희망이 있다는 역설을 이야기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화려한 수사를 가졌지만, 배가 가라앉기를 멈추도록 방향을 바꾸는 데 필요한 행동은 제안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명백히 생태문명에 반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자, 수많은 사람이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선 바로 자신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의 온도를 천천히 높이면 냄비 속의 개구리는 죽겠지만, 열을 갑자기 올리면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죠.”
최근에 주목받는 사상가들은 신기술 등장에 기대어 미래를 낙관하는 경향이 강하다. ‘인공지능과 바이오 기술의 발전으로 영생하는 신적 인류가 탄생할 것’(유발 하라리)이라든가 ‘하루 3시간씩 주5일만 일하고 보편적인 기본소득을 받는 유토피아가 가능하다’(뤼트허르 브레흐만), 심지어 ‘나노기술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해 대기를 산업혁명 이전 상태로 회복할 수 있다’(에릭 드렉슬러)고 공언하는 학자도 있다. 이런 전망들은 희망을 주고 어떤 희생과 불편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기분을 망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그걸로 만족해도 될까. 그동안 우리가 정당한 대가 없이 많은 것을 누려왔음을, 이제 자연이 그 대가를 요구하기 시작했음을, 대가를 미리 치르지 않으면 결국 파산할 것이라는 노신학자의 통찰과 예언을 쉽게 물리칠 수 없는 이유다.
김지훈 기자
화이트헤드에게 영감 받은 과정신학
존 캅은 1925년 부모가 기독교 선교사로 일하던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다. 그는 11살 때인 1936년 가족들과 함께 중국으로 여행을 가면서 한국을 들른 적이 있다고 한다.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중국으로 가는 길에 서울에 이틀 정도 머무르면서 광화문도 보고 절 같은 곳에도 들렀었습니다.” 지난 2004년 국제화이트헤드 학회에 참석한 이후로 10여 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6년 전에는 북한을 방문했었다고 한다. 그가 주창한 과정신학은 영국 출신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1861~1947)의 과정철학을 신학적으로 소화한 것이다. 그는 시카고대 신학대학원에서 화이트헤드의 제자인 찰스 하츠혼에게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배웠다. 특히 자연과 인간 주체를 분리한 데카르트를 비판하고,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 또한 주체이며 인간은 자연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체적 관계에 있다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정건화 교수는 “이런 ‘유기체 철학’은 모든 존재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동양 철학과 통하는 데가 많아, 중국에서도 화이트헤드와 캅을 서구 철학과의 대화 파트너로 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신 또한 모든 일을 계획해놓은 전지전능하고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의 행동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이 과정신학의 신 관념이다. 신 또한 이 세계와 함께 완성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열려 있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이런 과정신학은 기독교만이 진리가 아니라 다른 종교와 대화를 통해서 서로 보완할 수 있다는 종교적 다원주의로도 이어진다. 성서의 문자적인 해석에 기반해 동성애와 타종교 혐오나 낙태 반대 등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을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클레어몬트에서 100여명의 퇴직 목회자 등과 함께 ‘필그림 플레이스’라는 은퇴 시설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이마의 피부암으로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하기는 하지만 다른 큰 지병은 없다고 한다. 그는 육류는 먹지 않지만 해산물과 유제품은 먹는 ‘페스코 채식주의자’로 생태적 생활방식을 실천하고 있다.
김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