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문명

정건화_10 Ideas on Economy to Save the Planet

생태적 전환의 핵심은 경제시스템의 전환이다. 많은 경우 경제 시스템과 경제학자는 전환의 장애물로 작용한다. 실제로 많은 근시안적 이해관계자들이 투자를 지배하는 실물경제나 천연자원의 고갈을 고려하지 않는 주류 경제학이 그러하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파괴적인 체제로서, 원자재를 획득하고 더 많은 노동과 새로운 시장에 접근하기 위한 지속적이고 제국주의적 확장에 관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경제 팽창과 그로 인한 환경과 공동체의 황폐화는 자본주의의 결함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런 관점은 지금도 여전히 볼 수 있다. “기후변화는 우리의 천연 자원에서 인간노동의 결실에 이르기까지 이 행성과 그 사람들로부터 가치를 추출하기 위해 소수만을 위해 만들어진 경제 시스템이 초래한 가장 끔찍한 현상이다. 이 시스템이 위기를 만들어냈다. 기후변화는 그 중 가장 극단적인 징후이며 긴급히 그리고 시스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우리가 구할 수 있는 모든 것: 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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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철_지속가능도시와 그린뉴딜

기후・자연재생에 필요한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거대한 재・서비스의 전환수요를 새로운 환경산업과 일자리 창출(공정한 전환 및 안전망 포함)로 연계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생존과 생계위기를 돌파하고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만들자는 그린뉴딜 사업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EU의 그린딜(Green Deal), 미국 민주당의 그린뉴딜(Green NewDeal),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이 그것이다. 어쩌면 지금이 지구의 본격적인 자연역습을 막고 인간의 생존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지구의 지속가능발전의 성패는 지속가능도시 만들기에 달려있다. 도시가 산업혁명 이래의 대량생산・소비・폐기 거점을 졸업하고 지구 공통문제 해결에 공헌하면서 시민의 생존과 생계를 지키고 국제적인 책임을 수행하는 21세기 도시의 질적 고도화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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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건화_생태문명으로의 전환과 사회적 경제

생태위기는 우리가 익숙한 사회, 우리가 익숙한 문명의 ‘급진적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산업사회, 산업문명의 전환은 실로 지난한 과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해야 한다.

새로운 문명은 그 명칭이 무엇이든 핵심은 생태문명, 생태친화적 문명이 될 수밖에 없다.

생태문명을 위한 경제 체제는 지구의 수용 능력 안에서 운용되는 생태적 경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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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영_[지속가능개념어사전] 생태문명/문명/시민다움

산업 혁명 이후, 생태계와 그 구성원을 인류집단 ‘외부’에 있는 장소나 물질로 취급하며 둘 간의 유기적 관계를 인식하지 않는(못하는) 비-유기적 세계관과 문명 이 세계의 주류가 되었다. 비-유기적 문명이 초래했고 초래할 것으로 생각되는 심각한 문제들을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유기적 문명 또는 생태문명이 제안되고 있다. (중략)

‘문명’이라는 개념어를 탐구한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이처럼 ‘시민 되기’ ‘시민 교육’이라는 과제와 만났다. 하지만 오늘날 요청되는 바람직한 인간은 단순히 시민이 아니라 세계시민, 정확히는 생태 소양(ecological literacy)을 갖춘 세계시민이다. 경제의 세계화 속에서 개인의 낱 선택이 다른 국가의 타인이나 지구 생태계에게 일정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고, 문명의 기반인 지구 생태계의 훼손이 극심하여 문명 자체를 위태롭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오늘의 시민이 시선을 두어야 하는 공동체는 지역공동체나 도시/국가 공동체만이 아니라 인류공동체, 생태공동체, 지구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이런 결론이 가능하다. (1) 재학습(재교육)을 통한 시민의 거듭나 기만이 오늘날 문명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다. (2) 오늘날 생태문명은 문명의 한 가 지 형식이 아니라 문명의 유일한 형식이다.

원문: https://greenacademy.re.kr/archives/4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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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무_자원재활용에서 순환경제로

인성(人性)은 인간의 기본이 되는 정신적인 전제이고 순환경제는 사회경제의 대안적인 틀을 말하는데, 이 둘을 연결시키는 것은 사회과학에서는 환영 받을 수 없다. 인간이 자연생태와 관계를 가지는 방식 자체가 문화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물질적 측면을 말하면 경제이고, 그 중에서도 산업과 노동은 사람이 자연의 물질들을 직접 대하는 활동이다. 산업은 노동을 조직하는 방식이다. 사람은 자연 속에서 노동하 는 인간으로 존재한다. 노동하는 방식과 형태를 통해서 삶을 영위하고 자신을 표현한 다. 산업의 조직이 자연에서 벗어난 것일 때 이는 노동을 폭력적인 것으로 만들고 사람의 인성을 파괴하고 건강을 소진시킨다. 이러한 타율적인 노동에서는 창조적인 결실도, 노동방식도 나올 수가 없다. 노동이 문화로부터 소외되고 자연이 산업과 노동의 과정에서 파괴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이다. 그것은 경제와 경제학의 전제로 되어 있는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이다. 첫째는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아까워하지 말고 빨리 처분해야 한다는 생활 관념이다. 그럴 때 생활공간이 확보될 수 있고, 물자의 유동성이 커지고, 수요도 창출되고 경제의 흐름이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인구 또는 노동력은 생산에 필요한 소비 수요의 원천으로서는 중요하지만, 생산요소로서는 별로 능률적이지 못하고 사용을 줄여야 할 대상이라는 관념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두 흐름이 나타난다. 생태주의자들은 물질과 에너지 사용량이 지금의 생태환경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크게 넘으므로 인구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케인즈주의자들은 시 장이 커야 규모의 경제가 성립하고 산업이 안정적으로 발달할 수 있으므로 나라의 인구 규모가 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둘 모두 인구를 가치창출의 주체로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두 고정관념으로부터 사람을 가치창출의 원천으로서 소중히 여기고, 물자의 취득과 처분도 능률보다는 그 쓰임새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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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헌_생태문명과 신

지난 10월 11일 서울시가 국제 컨퍼런스를 열었다. ‘문명전환과 도시의 실험’이라는 주제를 가진 대회의 첫 강사는 93세의 신학자 존 캅(John B. Cobb, Jr.) 교수였다. 그가 던진 화두는 ‘생태문명’(ecological civilization)이었는데, 이 개념의 신빙성을 말하기 위해 그가 현대 기독교 사상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말하는 것을 잠시 접어두자. 대신 그가 일군의 제자들과 함께 한국에 오기 전에 거친 여행의 동선 을 언급할 필요는 있다. 그것이 그의 사상이 지닌 흡인력을 보여주는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캅 교수는 서울에 오기 전 중국에 이십여 일 머물며 서른여섯 번째 ‘과정사상 연구소’의 개소식에 참여했다. 이 일을 주도한 중국 측 주도그룹이 사회과학원의 지도급 인사들이고 그 사상의 확산을 지원하는 뒷배가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장 리잔 수(栗戰書)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캅 교수가 1973년 미국에 설립한 과정사상연구소(Center for Process Studies)를 본뜬 연구기관이 어떻게 불과 십여 년 만에 중국 의 주요대학들에 서른여섯 개나 복제될 수 있었는지 그 불가사의가 풀린다. 물론 연구기관의 성과물이 정책으로 실현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캅 교수의 생태주의 사상과 유기체철학에 기초한 ‘구성적’(constructive) 포스트모더니즘이 현재 중국 마오주의자들의 주요 참고문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임이 분명하다.

 

원문: http://www.gilmokin.org/board_VgfD64/4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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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헌_생태적 주체와 종교

진보하는 사회는 약탈적 풍요 위에 세워진 안락한 사회가 아니다. 진보하는 사회는 인간의 관심사들이 ‘평화’를 이루기 위해 유혹을 받는 사회요, 그것을 이룰 방 식으로 ‘비폭력/설득’의 길을 신뢰하는 사회이다. 역사의 진보란 단지 과학적 기술이나 철학적 신념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예술의 감각과 종교의 전망이나 결단 없이 역사는 도약하지 않는다.

사실 종교가 중요하다. 근대문명의 비극은 종교적 전망을 잃은 과학에 의존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반대로 과학적 세계관으로부터 분리된 종교 역시 근대문 명을 질곡으로 이끈 원인이 되었다. 자신의 낡은 관념을 수정할 용기를 갖지 못한 종 교는 과학에 패배하면서 결국 자신의 중요성까지 잃게 되었고 단지 ‘안락한 삶을 장식하는 형식신앙’이 되고 말았다. 평화(shalom)에 대한 비전으로 ‘직접적인 동의’를 불러일으키는 힘을 잃은 종교, 신의 분노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여 정서에 호소하여 연명하는 종교는 결국 외면 받는다. 그런 이유로 종교는 저항적 주체에게는 단지 ‘도구’였고, 해체적 주체에게는 ‘취향’이 되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익과 개체적 만족 너머 로 뻗어가도록 충동하는 종교적 힘을 잃은 문명은 쇠퇴할 수밖에 없다.

억압과 파괴로 얼룩진 문명을 싸매기 위해서는 생태적 주체가 필요하다. 자기 진리에 대한 충실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감각과 평화의 이상으로 충동질 당하는 영혼이 역사의 품에서 자라나야 한다. 자비로운 열정과 은혜로운 관계에 대해 겸손한 생태적 주체의 등장을 염원한다.

원문: http://thetomorrow.kr/archives/1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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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철_화이트헤드의 환경철학을 위한 초석

이 글의 목적은 현재 우리를 둘러싼 환경문제의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로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의 유기체 철학이 환경 철학과 환경 윤리적 문제에 적용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있다. 그의 유기체 철학을 환경 철학에 적용하여, 그의 환경 철학의 토 대를 마련하는 길은 수학과 논리에서 과학으로, 과학과 과학철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이어지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여정을 그의 용어대로,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하는 맥락에서 출발한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은 환경 철학에 적용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논리와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아가 환경문제에 대한 실천적 주장에 동의하는 부분을 충분히 함의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환경 철학과 윤리에 적용하기 위해, 나는 우선 그의 유기체 철학을 구성하는 주요 개념들을 자연 혹은 환경과 연관한 논의를 전개한다. 또한 나는 이 글에서 화이트헤드의 주 저인『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 및 다른 주요 저서들에 등장한 화이트헤드의 자연과 환경 개념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현재 환경운동이 생태 철학 중심으로 옮겨지면서, 어떻게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이 현재의 생태 문명 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지를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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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왕식_생태문명을 지향하여

이 글은 생태문제의 근원을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그리고 그것에 근거해 새로운 생태문명의 건설을 문제해결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대안은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에 기초해 추구된다. 화이트헤드의 입장에서 볼 때 생태학적 문제는 근대주의의 핵심 이론인 기계론과 인간-중 심적 주체론에 연관되어 발생한다. 물론 이 두 이론은 근대문명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생태학적 문제도 함께 가져왔다. 논자는 이 두 이론이 어떻게 근대주의의 핵심이 되었는지를 일차적으로 설명하고, 나아가 이들이 어떻게 생태학적 문제의 원인이 되어 왔는지도 설명한다. 하지만 이 글은 단지 근대주의의 부정적인 면만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해결책도 함께 모색한다. 인간중심적 주체론이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범-경험주의(pan-experiencialism)로서 응답할 수 있다고 주장하겠으며, 기계론의 문제에 대해서는 유기체의 철학으로 맞대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겠다. 또한 이 글은 화이트헤드의 생태철학과 심층생태학의 주장을 비교한다. 논자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심층생태학의 입장과 여러 면에서 유사점을 지닌다는 것을 먼저 지적하겠다. 그의 유기체 철학은 비-인간적 존재자들의 주체성을 과감하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인간과 다른 존재들 간의 무차별적 동등성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층생태학과 구별된다. 이 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화이트헤드 철학의 생태문명론이 인간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추가로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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